We often speak of “loving” art, but what is it about art that we mean to say that we love? Sadly, this love seems to come with many pitfalls. The first is deception. Deception is something like the grief that occurs when our love for art relies on the value judgments of others. When our perspective on the object is obscured by things like the zeitgeist or the rhetoric of people seen as established authorities, this love amounts to little more than retreading mediated affections.
The second pitfall is distrust. Sometimes, distrust arises because we know too much. “Knowledge” and “concepts” are merely part of the process of working to truly see an object; they cannot be allowed to repackage the object’s truth. Our intense questioning based on knowledge and concepts only bears fruit when it is in the service of loving the object. Too often, however, we are so taken by the linguistic properties of knowledge and concepts that we disbelieve what our own eyes see.
The third pitfall is purpose. A goal-oriented state is one of being single-mindedly focused on things that have nothing at all to do with loving art. Goals tend to distance us from solitude, and provides convenient excuses for the familiar and wrong decisions that the foundation of our conscience knows. Purpose may provide a driving force, but it cannot be described as “love.” Art in this case becomes a sleek, polished tool for approaching goals.
Not many people are able to elude the three aforementioned traps. Perhaps the best we can aim for is to command ourselves to disregard them. A more awkward outcome arises when we seek to obscure those pitfalls with florid rhetoric, with excessive justification, and with an affected attitude of speaking for the “common good.” This exhibition offers a glimpse at the work of three artists, Sueyon Hwang, Kim Jipyeong, and Jazoo Yang. Each of them has applied their own learning, preferences, thoughts, and talents to create a distinct artistic vision. Those worldviews manifest materially as artwork that occupies space.
Matter is a terrifying and wondrous thing, in that it shows the false to be false and the true to be true. The journey of material realization includes moments of stepping into the inevitable traps and efforts to find ways around them. Each work of art is a totality: while not all of an artist’s past decisions can be incorporated into a single artwork, the current work could never appear without all the decisions made in the past. How do we view the object before us when we have no plausible “knowledge” of it, clever “concepts” or “meanings” given to us like a set answer? How can our knowing give rise to intuition? How can our own intuitions encounter the artwork? This may ultimately be a quite secretive act. Among all those secrets, the approximate sense — the one that never perfectly aligns — may represent the feeling of love. And while it may only be an approximation, I see this as a love that can be trusted.
Nouskop
Additionally, the Nouskop program will be held three times over the course of the exhibition to practice a leisurely perception, recognition, and observation of art. Nouskop is formed of the Greek words nous and skopeo; nous is most commonly translated as “mind,” “intellect,” “reason,” or sometimes “soul,” while skopeo means “to look at” or “observe.”Suzy Park (Curator)
우리가 수월하게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술의 무엇을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애달프게도 이 사랑에는 너무나 많은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만입니다. 기만은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기대어 있을 때 일어나는 서글픔 같은 것입니다. 시대의 감수성이라던가, 자명하게 권위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의 언술 따위가 사물을 보는 자신의 눈을 가릴 때, 이편의 사랑이란 그저 알선된 애정을 답습하는 일일 것입니다. 둘째는 불신입니다. 때때로 불신은 너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지식과 개념은 사물을 진실로 바라보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 있을 뿐, 그것이 사물의 진실을 포장해서는 곤란합니다. 지식과 개념을 토대로 한 치열한 의심은 사물을 사랑하기 위한 것일 때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지식과 개념의 언어적인 성질에 이내 사로잡혀 눈에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목적입니다. 목적 지향적인 상태는 실상 예술을 사랑하는 일과는 일절 관련 없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태도입니다. 목적이란 대체로 고독을 요원하게 하며, 양심의 밑바탕은 알고 있는 그릇된 선택에 용이한 핑계를 만들어줍니다. 목적은 추동력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랑으로 불릴 수는 없습니다. 이때 예술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말끔하고 세련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의 함정을 비껴갈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저 적당히 함정을 외면하려는 자신을 극기하려는 노력만이 최선의 실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함정을 의미로 대체하고자 미사여구를 남발하고, 정당성을 과용하고, 공리를 대변하려는 자세로 꾸며 부풀리는 것이 더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지평, 양자주, 황수연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각자의 배움, 기호, 생각, 재능을 토대로 자신의 작업 세계를 꾸리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들 각자의 세계관이 작품이라는 물질로 드러나 공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거짓을 거짓으로 보여주고, 진실을 진실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렵고도 경이로운 것입니다. 이 물질화의 여정에는 필경 함정을 디뎌보기도 하고, 우회할 길을 찾기도 한 시간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작품 한 점에 한 예술가가 그간 해온 모든 선택이 들어갈 수 없지만, 그동안의 모든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작품들도 드러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작품은 하나의 총체입니다. 눈앞에 놓인 사물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지식도, 근사한 개념도, 정해진 답처럼 주어진 의미도 없을 때,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바라볼 것인가. 나의 앎은 어떻게 직관을 낳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나의 직관과 작품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끝내 매우 비밀스러운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여럿의 비밀 사이에서 결코 맞아떨어지지 않는 근사치의 감각이 어쩌면 사랑의 느낌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비록 근사치일 뿐이라 하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랑임을 믿습니다.
누스콥(Nouskop)
전시 기간 중 직관 연습 모임‹누스콥(Nouskop)›을 세 차례 엽니다. 작품을 천천히 인지하고, 감각하고, 직관하는 모임입니다. 희랍어에서 누스(nous)는 ‘이성, 지성, 정신, 영혼’을, 스코페오(skopeo)는 ‘보기’를 뜻합니다.글 박수지(독립 큐레이터)